오늘 극단 "새벽지기"에서 기획한 작품으로 남아프리카 "아돌후가드의 "메카로 가는 길"을 읽고 새로 쓴 "독후감 연극"인 "니르바나로 가늘 길" 첫 울산공연을 보고 느낌을 담아 놓고자 몇자 적어봅니다.
니르바나!
불가에서 사용하는 말로 열반(涅槃)을 산스크리트의 음역하면 니르바나라고 하지만, 작품에서는 "어머니 자궁과 같은 곳"으로 해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윤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작의 자리가 미혹과 집착의 모든 것들로 부터 자유로워지고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길끝이 바로 열반라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나(我)가 되기 이전의 자리가 곧 열반의 자리이므로 결국 몸사람이 만들어진 그 곳이 어머니의 자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사바세계에서 몸사람으로 살아가자면 적잖은 삶의 흔적들이 누구가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겟지만, 그 당연함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므로 또다른 아픔과 상처들을 지니고 있는것이겟지요.
운명이란,
"외부의 환경으로 부터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선택"이라고 작품은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운명을 "외부로 부터 강요된 선택"이라고 받아 들이기에는 "선택의 자유"라는 큰 선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삶에는 수많은 방향이 있고, 그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기에 모두가 고민하겠지요. 하지만, 그 선택을 외부의 거대한 힘앞에 강요받았든 아니면 스스로 선택을 하든 그 몫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만 되겠지요. 결국 자신의 니르바나의 길은 홀로 걸어가야하는 이치와 같은 뜻이 아닐런지....
작품에서 "옥이 할머니의 죽음이 그리고 미자 할머니의 죽음"이 마치 예견된 자살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니르바라로 향해 가는 길" 수없이 많은 선택에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최선의 삶의 방법을 선택하여 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우리"라는 개념을 연출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은 동물을 가둬두는 "울"이나 일정한 지역을 둘러친 "울타리"와 같은 말이다. 따라서 "우리"라는 말 속에는 이편과 저편의 구분이란 "차단"의 의미와 어느 곳에 가둬진다는 "고립"의 의미가 중의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나" 들이 관계 지어 형성되는 집단적 개념이다. (중략)
수많은 "나"들은 숫자만큼 다양하고 각양각색이며 때로는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충돌을 빗기도 한다. 바로 이 때, 이 충돌의 순간 "우리"는 "나"와 "너"로 분리로 선언하고 날선 이질성을 표면화 시키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는 융합되지 못한 "너" 또는 "너들"과 분리된 "나"들을 소집하고 저편을 "차단", "고립"시킨다. 이것이 "우리"의 배타성이며 허울 좋은 "공동체주의"의 폭력성이다. (이하 중략)
어찌되었든 가슴에 의미가 뭍어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공연이 끝난후 가슴으로 그리고 손으로 떠겁게 박수를 보냈으니 말입니다.
비온뒤 태화강을 따라 깨끗한 도로를 달리는 차안에서 "거짓과 비밀의 차이"에 대한 미자 할머니의 물음이 귀전에 울리고 있었나 봅니다...
니르바나!
불가에서 사용하는 말로 열반(涅槃)을 산스크리트의 음역하면 니르바나라고 하지만, 작품에서는 "어머니 자궁과 같은 곳"으로 해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윤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작의 자리가 미혹과 집착의 모든 것들로 부터 자유로워지고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길끝이 바로 열반라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나(我)가 되기 이전의 자리가 곧 열반의 자리이므로 결국 몸사람이 만들어진 그 곳이 어머니의 자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사바세계에서 몸사람으로 살아가자면 적잖은 삶의 흔적들이 누구가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겟지만, 그 당연함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므로 또다른 아픔과 상처들을 지니고 있는것이겟지요.
운명이란,
"외부의 환경으로 부터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선택"이라고 작품은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운명을 "외부로 부터 강요된 선택"이라고 받아 들이기에는 "선택의 자유"라는 큰 선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삶에는 수많은 방향이 있고, 그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기에 모두가 고민하겠지요. 하지만, 그 선택을 외부의 거대한 힘앞에 강요받았든 아니면 스스로 선택을 하든 그 몫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만 되겠지요. 결국 자신의 니르바나의 길은 홀로 걸어가야하는 이치와 같은 뜻이 아닐런지....
작품에서 "옥이 할머니의 죽음이 그리고 미자 할머니의 죽음"이 마치 예견된 자살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니르바라로 향해 가는 길" 수없이 많은 선택에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최선의 삶의 방법을 선택하여 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우리"라는 개념을 연출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은 동물을 가둬두는 "울"이나 일정한 지역을 둘러친 "울타리"와 같은 말이다. 따라서 "우리"라는 말 속에는 이편과 저편의 구분이란 "차단"의 의미와 어느 곳에 가둬진다는 "고립"의 의미가 중의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나" 들이 관계 지어 형성되는 집단적 개념이다. (중략)
수많은 "나"들은 숫자만큼 다양하고 각양각색이며 때로는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충돌을 빗기도 한다. 바로 이 때, 이 충돌의 순간 "우리"는 "나"와 "너"로 분리로 선언하고 날선 이질성을 표면화 시키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는 융합되지 못한 "너" 또는 "너들"과 분리된 "나"들을 소집하고 저편을 "차단", "고립"시킨다. 이것이 "우리"의 배타성이며 허울 좋은 "공동체주의"의 폭력성이다. (이하 중략)
어찌되었든 가슴에 의미가 뭍어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공연이 끝난후 가슴으로 그리고 손으로 떠겁게 박수를 보냈으니 말입니다.
비온뒤 태화강을 따라 깨끗한 도로를 달리는 차안에서 "거짓과 비밀의 차이"에 대한 미자 할머니의 물음이 귀전에 울리고 있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