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새벽은 

'뭇생명이 공존·융합하는 세상을 꿈꾸며_삶의 연극화, 역사의 연극화'를 모토로 부산지역에 거점을 두고 1984년에 창단되었습니다.

극단새벽은 독립(인디) 연극운동과 소외받는 소수자,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형상화하는 창작 작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연극의 대중성 확장을 위한 연극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하며, 상업주의 문화흐름에 대한 대안적 문화 형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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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월경, 줄장미,그리고 니르바나로 가는길'

서분숙
2011-05-20
조회수 2593
'니르바나로 가는 길'의 무대는 언어를 담고 있는 집이다. 이 연극은 언어로 만든 연극이다. 언어가 아니었다면 이 연극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주 절제된 구조로 지어진 집, 방과 부엌과 탑을 중심으로 한 마당, 배우들의 움직임 또한 이 삼각의 구도속에 모두 담겨있다. 무대의 배우들이 직접 담은 세월은 80년 안팎이지만 무대가 암시한 세월은 수천년을 넘나든다. 인간의 욕망이 태동된 시점이 이 연극이 출발한 시점이다.
그 무거운 세월을 절제된 구조와 삼각의 동선속에서 언어로만 표현해야하는 배우들에게 나는 안쓰러움을 넘어선 연민을 느꼈다. 어쩌자고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인간의 욕망과 결핍을 저 한몸에 담고자 했던가. 표현 수단은 언어뿐이다. 아, 아니다, 느린 걸음, 쪼그려 앉은 모습, 그리고 타로.... . 배우들에게 느끼는 연민은 나를 관객으로 온전히 연극에 몰입할 수 없게 했다. 차라리 연극을 깨버릴까? 설령 관객에 의해 연극이 중단된다 하더라도 그 또한 연극의 일부가 아닌가? 하지만 나는 연극을 끝까지 다 보고야 말았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분리하거나 차단 시키고 있을지 모를 '너'혹은 '그'에 대한 극단 새벽의 성찰-
이라고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은 '타인의 욕망'으로 살아지는 삶이다. 아기가 어머니의 바람대로 행동한는 것이 생존 조건이듯, 어머니를 사랑하고픈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욕망을 포기하듯이, 우리의 삶은 대부분 타인의 욕망이 지배하고있다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미자, 옥이 할머니 또한 전쟁이라는, 원치 않았던 타인의 욕망에 의해 억압당한 삶을 산 인물들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결핍'을 느끼는 순간이다. 자신이 살고팠던 삶을 느끼는 순간이 '결핍'을 느끼는 순간이다. 옥이 할머니와 미자 할머니의 죽음이 또다른 시작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이 '결핍'의 호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이 담고 있는 이미지일 뿐, 또, '죽음'이기에 그 호소가 가능한 것일 뿐,  살아있는 인간의 삶에서는 '나'답게, 욕망을 배제하고 '더불어'산다는건 이데아의 세계일 뿐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결핍'의 순간을 자주 느끼고 얼만큼 깊이 자신을 성찰하는가가 삶의 '울타리'를 낮추는 길이 될 것이다.

연극을 본 며칠 뒤, 나는 자주 오월의 줄장미를 보면 왜 그렇게 염증이 일듯 마음이 쓰리고 아렸던지를 알게 되었다. 핏물처럼 툭툭 시멘트 담벽에 번지듯이 피어난 붉은 장미꽃, 그것은 첫월경의 기억이었다. 이 글에서는 말하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첫월경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줄장미'에 대한 내 아픔이 '첫월경'의 핏물에 대한 기억에 있었다는건 '무의식'의 출현이다. 그 만남은 '니르바나로 가는 길'위에서  이루어졌다.
'니르바나로 가는길', '첫월경', '붉은 줄장미' 서로 다른 이미지나 개체들은 우연한 길에서 만나 한몸과 같은 언어의 집을 짓는다. 그것은 통찰이며 치유이다.
당신들도 '니르바나로 가는 길'위에서 가슴 저 밑바닥의, 당신조차 깜깜하게 모른는 '무의식'을 길어 올리시라. 당신과 만난 무의식은 더이상 무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용기며 기쁨이며 치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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