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
지구의 역사가 46억년이라면 나의 시작도 어쩌면 그때부터일지도...
그때 이미 나는 안드로메다(우주)와 함께 있었다.
지구인이 된 나,
어느덧 40대 중반의 나는, 그 기억을 잊고 산다.
문득 어느날, 나는 내 무의식 속에 '성장'을 기다리며
자신을 발견해줄 또다른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은 '안드로메다'
지구인들에게 상처받은 나,
지구에 적응하지 못한 나,
그렇지만 언젠가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긍정해줄 날을 그리워하는 나,
그녀를 들여다 본다.
이제는 그녀를 지금여기로 불러낼수 있다.
아득히 잊어버렸던 고향 감나무를 그리듯,
잃어버렸던 꿈을 다시 만나듯,
너무나 그리웠던 그녀를 응시한다.
그녀의 이름은 '성장'이다.
사회 통념과 상식에 안주하지 않을 수 있는 '성장'
나만의 독특한 이름으로 나를 명명할 수 있는 '성장'
나와 다른 사람들과, 지구와 다른 안드로메다와 연결할 수 있는 '성장'
그것은 어쩌면 영원한 미해결 과제가 아닐까?
안드로메다와 지구가 만나는 날이 38억년 후 인 것처럼...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성장의 꿈'을 멈추는 일이 불가능하듯,
안드로메다로 향한 인간의 꿈은 계속 될 터이다.
단지, 그 길을 찾는 것. 그 길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찾는 것..
<우리는 안드로메다에서 왔다> 연극은
그 길이 어머니와 자기의 연대를 회복하는 길임을 말해주는 듯 하다.
지구의 상식을 극복한 <나>,
안드로메다의 어머니로 성장한 또다른 <나>는,
나를 존재할 수 있게끔 해주는 그 모든 것들과의 연대를 회복하는 것,
그 연대를 회복하는 첫 단추는,
또 다른 <나>, 나와 항상 함께 했던 또 다른 <나>를 이해하는 것.
어느날 문득 나는 발견했다.
내 안의 또다른 <나>, 안드로메다에서 온 <나>의 이름은
<양심>이었다는 사실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양심>은 아주 소박하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그 소박한 <양심>이 성장하지 못하고 상처받으며 견뎌야하는 현실.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가부장제란 이름으로
나의 <양심>을 숨막히게 했던 거대한 시스템.
40대 중반의 어느날, 그 거대한 시스템에 무기력해 있을 즈음 만난,
<우리는 안드로메다에서 왔다> 연극은,
내가 기억하는 것 보다 더 오래된 나의 벗 <안드로메다>를
다시 깊게 응시하게 한다.
나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
지구의 역사가 46억년이라면 나의 시작도 어쩌면 그때부터일지도...
그때 이미 나는 안드로메다(우주)와 함께 있었다.
지구인이 된 나,
어느덧 40대 중반의 나는, 그 기억을 잊고 산다.
문득 어느날, 나는 내 무의식 속에 '성장'을 기다리며
자신을 발견해줄 또다른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은 '안드로메다'
지구인들에게 상처받은 나,
지구에 적응하지 못한 나,
그렇지만 언젠가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긍정해줄 날을 그리워하는 나,
그녀를 들여다 본다.
이제는 그녀를 지금여기로 불러낼수 있다.
아득히 잊어버렸던 고향 감나무를 그리듯,
잃어버렸던 꿈을 다시 만나듯,
너무나 그리웠던 그녀를 응시한다.
그녀의 이름은 '성장'이다.
사회 통념과 상식에 안주하지 않을 수 있는 '성장'
나만의 독특한 이름으로 나를 명명할 수 있는 '성장'
나와 다른 사람들과, 지구와 다른 안드로메다와 연결할 수 있는 '성장'
그것은 어쩌면 영원한 미해결 과제가 아닐까?
안드로메다와 지구가 만나는 날이 38억년 후 인 것처럼...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성장의 꿈'을 멈추는 일이 불가능하듯,
안드로메다로 향한 인간의 꿈은 계속 될 터이다.
단지, 그 길을 찾는 것. 그 길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찾는 것..
<우리는 안드로메다에서 왔다> 연극은
그 길이 어머니와 자기의 연대를 회복하는 길임을 말해주는 듯 하다.
지구의 상식을 극복한 <나>,
안드로메다의 어머니로 성장한 또다른 <나>는,
나를 존재할 수 있게끔 해주는 그 모든 것들과의 연대를 회복하는 것,
그 연대를 회복하는 첫 단추는,
또 다른 <나>, 나와 항상 함께 했던 또 다른 <나>를 이해하는 것.
어느날 문득 나는 발견했다.
내 안의 또다른 <나>, 안드로메다에서 온 <나>의 이름은
<양심>이었다는 사실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양심>은 아주 소박하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그 소박한 <양심>이 성장하지 못하고 상처받으며 견뎌야하는 현실.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가부장제란 이름으로
나의 <양심>을 숨막히게 했던 거대한 시스템.
40대 중반의 어느날, 그 거대한 시스템에 무기력해 있을 즈음 만난,
<우리는 안드로메다에서 왔다> 연극은,
내가 기억하는 것 보다 더 오래된 나의 벗 <안드로메다>를
다시 깊게 응시하게 한다.